국내서 만든 최고 성능의 에스프레소 머신 감동을 마시다
서울 서교동 엘카페
책장을 정리하다가 낡은 커피 봉투를 발견했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 커피 봉투를 버리지 못하고 책장 속에 남겨두던 습관이 있었다. 지난번 이사를 하면서 집사람의 등쌀에 모두 정리한 줄 알았더니, 하나가 용케 남아 있었나 보다. 오래된 종이 봉투에 향기가 남아있을 리는 없지만, 5년 전 낯선 도시를 헤매다 찾아 들어간 카페에서 나를 맞아주던 파란 눈의 바리스타들의 따듯한 시선과 맛있는 커피 한 잔이 떠올랐다. 누구나 한두 번은 커피와 얽힌 추억이 있지 않을까? 떠나버린 인연, 여행지에서의 따뜻한 커피 한 잔, 찜통같이 더운 날의 아이스커피처럼.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듯이, 특별한 한 잔의 커피를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그런 커피들을 스페셜티 커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스페셜티 커피에 대한 의미는 다양하지만, 미국 스페셜티 커피 협회의 정의가 무난하다. 커피의 향기와 맛, 질감, 밸런스, 후미 등 10가지 항목을 전문가들이 세분화하여 점수로 평가하여 일정 수준(총점 80점 이상)을 통과하면 스페셜티 커피라고 한다. 맛이라는 표현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에 특정 기준으로 재단하기는 조심스럽지만, 합리적 접근과 과학적 방법이 동원되는 시스템이 사회적으로도 관심을 얻는 것 같다. 더불어 현지 농민들의 처우에도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져서 진정성 있는 현지 연계 활동 등이 다시 커피 품질로 환원되는 선순환 구조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커피 업계의 공룡인 스타벅스의 매출에 타격을 줄 정도로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한국에도 입점이 되어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의 경우도 이런 영향에 기인했다는 것이 전반적인 의견이다.
서울 마포구 지하철 합정역 너머 서교동 한편에 위치한 엘카페는 한국의 바리스타들이 추천하는 스페셜티 커피 전문 매장 중 한 곳이다. 고품질의 생두를 직접 수입하고 완성도 있는 품질의 로스팅을 하면서, 커피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추출을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매장의 인테리어는 소박하고 검소하다. 엘카페의 양진호 대표는 테라로사의 이윤선 부대표, 커피리브레의 서필훈 대표와 함께 한국 최초의 COE 심판관이다. COE는 Cup of Excellence의 줄임말로, 커피업계의 올림픽과 같은 행사다. 일 년에 한 번씩 일부 커피 생산국가에서 경연대회가 벌어진다.
로스팅 머신·그라인더 등 화제가 되는 기물이 많지만, 엘카페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에스프레소 머신 비다스테크의 헥사곤이다. 수입 머신이 장악한 시장에서 돋보이는 한국산이다. 통상적으로는 에스프레소 머신이 정압인 9bar의 압력으로 추출이 된다면, 비다스테크(대표 방정호)의 머신은 저압과 고압을 자유자재로 변화시켜 커피에 다양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여기에 연속 추출에 따른 온도 저하를 방지하는 효과도 좋아, 꾸준하고 안정적인 커피 추출이 가능하다. 커피 추출에서 압력의 변화와 온도보정의 효과는 생각보다 변수가 커서 확연한 차이를 나타낸다. 아직은 내구성을 테스트 중이지만, 현재까지는 전 세계의 모든 커피 머신을 찾아보아도 이 정도의 기능을 찾기는 힘들 듯하다. 그나마 에스프레소 머신계의 벤츠와 BMW에 비유되는 ‘시네소’와 ‘라마르조코’의 고가모델이 단편적으로 비슷한 성능을 보이고 있다. 변변한 양산 모델이 없는 한국에서 세계 최고의 성능을 가진 에스프레소 머신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외국의 유명한 매장의 바리스타들도 꾸준히 구입 의뢰를 해온다고 한다. 양산 단계 직전까지 이르렀지만, 비다스테크의 무모한 시도가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한 엘카페의 협조와 공동체 의식이 남다른 스페셜티 커피업계의 특징 덕택인지도 모른다. 참고로 양산모델 1번 머신은 서필훈 대표의 커피리브레에서 사전 예약을 완료했다.
엘카페에서 르완다 COE 3등 입상 커피를 에스프레소로 마셔보았다. 다양하고 섬세한 향기와 맛을 지니고 있는 커피라서 바리스타들도 추출 준비에 조심스럽다. 몇 차례에 걸쳐서 그라인더 세팅을 하고 추출 오차 편차를 줄여보고자 여러 잔의 샘플 커피가 소모되었다. 커피 생두 수입가격이 일반 커피의 10배에 가까운 가격이라 원가 부담이 만만치 않을 텐데, 좋은 커피일수록 세팅에 공을 들인다.
소박한 인테리어의 엘카페 내부 모습.
호랑이 무늬를 닮은 커피 위의 크레마가 안정적이어서 육안으로도 커피 추출이 잘 되었음이 느껴진다. 작은 잔 깊숙이 향기를 느끼고 커피를 마셔 보았다. 맛있다. 아니 훌륭하다. 밸런스와 후미와 자연스러운 단맛을 중요시하는 엘카페의 커피 철학이 한 잔의 커피에 잘 응축되어 있다. 경쾌한 꽃 향기와 과일 향이 코를 자극한다. 입안에 넣었을 때 꽉 채우는 듯한 질감과 초콜릿과 같은 견고한 바디, 캐러멜 같은 달콤함에 인삼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토질의 느낌까지 생생하다. 질감, 맛, 향미도 좋지만, 목 넘김과 후미에서 오는 느낌도 좋다. 좋은 커피가 가지고 있는 기본기에 꼼꼼한 로스팅, 정성껏 추출한 바리스타의 노력이 느껴진다. 가끔씩 만나는 좋은 커피 한 잔에는 깊은 울림과 감동이 있다. 좋은 커피 한 잔에는 산지 농민의 재배 과정과 로스팅한 업체의 특성, 커피를 추출한 머신, 바리스타의 궁합이 잘 녹아들어 있다. 한 가지 종류의 단종 커피 머신 추출이 가능한 매장이지만, 기본적인 블렌딩 커피 추출도 무난하고 권장할 만하다.
핸드드립 커피는 칼리타 웨이브 필터 드리퍼의 침지형 구조와 해바라기 모양 필터를 사용했다. 커피 본연의 깊은 맛을 잘 표현하고 미분에 의한 잡미를 잘 방지해준다. 에스프레소 머신 추출 커피에서는 향기와 질감이 잘 부각이 된다면, 핸드드립에서는 깔끔하고 우아하면서 차와 같은 풍미가 곁들여지는 것 같다.
이외에도 에스프로라는 기물을 이용한 ‘오늘의 커피’는, 양질의 커피를 저렴한 가격에 마셔볼 수 있다. 스페셜티 커피 분야가 확대되면서 지속적으로 커피의 발전과 기물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에스프로의 경우는 프렌치 프레스를 응용해서 만든 추출 기구로 커피가 가지고 있는 매끈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더욱 부각시켜 주는 경향이 있다. 혹 시장하거나 달콤한 커피가 생각이 난다면, 매장의 바리스타들이 직접 밤을 새워 졸인 바닐라 시럽을 첨가한 바닐라라떼도 추천한다. 화학첨가제를 배제해서 바리스타들이 자주 만들어야 하는 수고가 있지만, 달콤하고 맛있다.
고가의 생두를 기반으로 좋은 커피를 만들어내고 독창적인 에스프레소 머신 추출과 다양한 핸드드립 커피를 추구하는 엘카페이지만, 커피 판매만으로는 수익을 내기가 어렵고, 원두 판매가 뒷받침되어야 매장 유지가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끊임없이 커피에 대해 연구하고 발전시켜 가는 덕분에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고마울 뿐이다. 각종 커피 세미나와 미식클럽을 꾸준히 진행하는데,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아서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매장의 위치가 찾기 힘들어서 초행길이라면 스마트폰 검색을 찾아봐야 할지도 모른다.
심재범
아시아나항공 선임사무장, 아시아나항공 바리스타 그룹장. 미국 스페셜티커피협회(SCAA) 큐그레이더. 호주관광청 인증 바리스타. 저서 ‘카페마실’ ‘스페셜티 커피 인 서울’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